[홍대스트리트북스] 책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번역가 조민영 / 기사승인 : 2023-12-20 00: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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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책이라는 세계 │헤르만 헤세│역자: 김지선│뜨인돌

 책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업계를 홍대 바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곳에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리우던 홍대의 옛 정취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홍대에서 활동 중인 네 명의 출판인이 돌아가며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번역가 조민영] “100권의 책을 빡세게 읽으세요. 무조건 인생이 바뀝니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뒤적이다 이 광고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무조건 인생이 바뀐다니, 속는 셈 치고 한번 들여다봤다. 요는 이렇다. 인생을 바꾸려면 생각을 바꿔야 하고 생각을 바꾸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거기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화두인 ‘문해력’을 강조하며, 문해력이 떨어지면 의견과 사실을 구분하지 못해 오해가 빚어지고 결국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책을 골라주고 서평을 쓰면 수료증도 준다는데, 물론 공짜는 아니다. 한 권의 서사에 오롯이 집중하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불안과 자아실현 욕구를 자극하고, 거기에 상술을 가미한 전략이다.

 

‘책 없는 집’이 보통이었던 시대를 산 헤르만 헤세가 ‘대국민 문해력 향상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목표로 독서를 권장하는 이런 광고를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닥치는 대로 읽는 남독과 잘못 읽는 오독을 경계한 헤세였으니, 나처럼 약간 불편한 마음이 들었으려나.

 

인생 목표가 저마다 다르므로 어떤 사람에겐 저런 전투적 독서가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겠다. 대신 조금 느슨하게 천천히 그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헤르만 헤세의 책이라는 세계〉를 권하고 싶다. 헤세가 1900~1960년에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한 독서, 문학, 글쓰기 등 책에 관한 단편을 모은 작품집이다.

 

헤세는 “인간이 자연에게서 거저 얻지 않고 스스로의 정신으로 만들어낸 수많은 세계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책이라는 세계다”라고 말한다. 또 “말과 글과 책이 없이는 역사도 없고 인간이라는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고도 한다.

 

이 두 구절만으로도 인간이라면 마땅히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하지만 요즘은 유혹이 너무 많다. 헤세 시대에는 신문이 책의 가장 위험한 훼방꾼이었다고 하는데, 우리 시대에는 스마트폰이라는 전대미문의 훼방꾼이 우리 몸과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책을 멀리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점도 안타깝지만, 읽을거리가 넘쳐 책의 가치가 훼손되는 점도 걱정이다.

 

어쩌면 오히려 이런 시대야말로 노 거장 헤세가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책 예찬과 독서의 기본에 관한 이야기가 더 큰 울림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책은 진지하고 고요히 음미하고 아껴야 할 존재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책은 그 내면의 아름다움과 힘을 활짝 열어 보여준다.”

 

이 아름다운 한 문장은 책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어려운 사람에게도, 다들 좋다는데 왜 좋은지 모르겠는 사람에게도, 나처럼 책의 물성에 빠져 쟁여만 놓고 읽기는 게을리하는 사람에게도 글줄마다 밑줄을 긋고 책을 사랑하게 만든다.

 

헤세는 읽기 능력을 ‘마법의 열쇠’라고 표현한다. 읽기는 누구나 배우지만 얼마나 강력한 보물을 손에 넣었는지 깨닫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헤세가 말하는 진정한 독자란, 아마도 이 열쇠가 꼭 맞는 한 세계의 자물쇠를 찾아 열고 그 광활한 세계가 얼마나 다채롭고 즐거운지 깨우친 자일 것이다.

 

다만 작가는 그 세계로 들어가는 독자가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편견이나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를 꼽는다. 거만한 단정과 독선도 내려놓으라 한다. 또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 도서 목록 따위는 없으며, 각자 나름대로 만족과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일정량의 책이 있을 뿐이라고 우리를 다독인다.

 

나이가 많건 적건 책의 세계로 들어가는 자기만의 길을 찾아낼 때, 그 과정에서 완전무결한 판단이 아닌 수용성과 진솔함, 선입견 없는 자세를 지닐 때, 우리는 진정한 ‘자기 판단’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인생 대선배 헤르만 헤세가 한 말이니 왠지 더 믿음이 간다면 이 또한 편견일 수 있겠다. 어떻든 나는 이것을 ‘안목’이라 부르고 싶다. 100권의 책을 읽어 인생을 바꾸기는 힘들겠지만 안목을 가꾸기는 해볼 만하지 않은가.

 

 

|번역가 조민영. 세 아이가 잠든 밤 홀로 고요히 일하는 시간을 즐긴다.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번역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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