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규 칼럼-국제정세의 진실] 트루먼의 공산주의자 특사…제섭과 한국전쟁의 운명<1>

편집국 / 기사승인 : 2024-06-20 12:2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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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태규 한국외국어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한국전쟁 5개월 전 공산주의자 필립 제섭 특명전권대사를 대한민국에 보냈다. 그는 한국전쟁 중 백악관 등의 전쟁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했다. 북한군·중공군의 침공을 막아야 하는 미국의 전쟁 수뇌부에 공산주의자가 존재한 사실은 역사의 역설이다. 이런 모순이 있을 수 없다. 유엔군이 결국 한반도 통일에 실패한 원인을 찾는 중대한 실마리다. 당시 미국 군대 등 정부 곳곳에는 공산주의자 또는 동조자가 수두룩했다. 그러나 전쟁 직전 제섭의 한국 방문은 한반도 비극의 전조였다.


1945년 주중대사 패트릭 헐리는 트루먼에게 보낸 서한에서 “중공에 동조하는 ‘차이나 핸즈(China Hands)’가 국무부에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전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과 트루먼은 국무부·재무부·군대 등에 중공을 돕는 소련 스파이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깊숙이 침투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보호·비호했다. 제섭은 국무장관 딘 애치슨과 함께 친 중공이었다.

■한국은 제섭의 정체를 몰랐다

제섭은 1950년 1월 한국에 왔다. 이승만 대통령, 신익희 국회의장 등과 회담. 신성모 국방장관과 38선 방문. 서울대 총장 등 교육계·언론계 20여 명과 집단 면담. 서울대 명예법학박사. 컬럼비아 대 동창회. 미국의 특사답게 한국을 주름잡으며 극진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은 그의 정체에 대해 전혀 몰랐다. 제섭 본인과 미 대사관이 남긴 상세한 국무부 방한 기록 어디에도 제섭이 공산주의자임을 낌새챈 흔적이 없다. ‘투철한 반공주의자’로 알려진 트루먼이 설마 공산주의자를 보냈으리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그에게 각종 원조를 부탁했다. 영어교육을 도와 달라고도 했다.

그러나 제섭은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념 성향대로 한국의 국가보안법, 인권, 정치자유에 관한 발언을 되풀이 했을 뿐이다. “한국인들과 정부는 미국의 더 확실한 정책과 더 많은 원조를 기대했으나 실망했다”고 미 대사관은 보고했다. 공산주의자인 그가 무엇 때문에 자본주의 대한민국을 원조하겠다고 약속하겠는가?

한국은 그만큼 국제정세, 미국 정치상황에 캄캄했다. 한국전쟁 74주년인 지금까지도 제섭이 어떤 인물인지, 한국전쟁 때 무슨 역할을 했는지 모른다. 트루먼, 한국을 태평양 방위선에서 뺀 애치슨의 실체를 모른다. 한반도의 불행한 운명은 당시 3인의 존재로 이미 결정되었다.

제섭은 1897년생. 예일대 법대, 컬럼비아대 법학박사. 국무부 변호사. 유엔 주요 위원회 고문. 2차 대전 후 국제금융체제 구축을 위한 브레턴우즈 회의 등 유엔 주요 회의 미국대표. 1949~1953년 특명전권대사.

그는 대사 때 애치슨의 지시로 ‘미국과 중국 관계’ 백서를 만들었다. 모택동이 장개석을 중국에서 몰아 낼 즘이었다. 미국이 중국을 공산당에 넘겼다는 비판에 대한 애치슨의 대응인 백서는 중공을 칭찬하며 장개석 정부에 모든 책임을 돌려 논란을 빚었다.

■소련 간첩을 편든 제섭과 애치슨

제섭은 1940년 대 후반 미국을 충격에 빠트렸던 간첩 엘저 히스 재판에서 증언했다. “그의 진실성, 충성심을 의심할 어떤 이유도 없다.”

히스는 공산주의자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소련 문제 핵심 고문. 얄타 회담 등 배석. 그러나 회담에 앞서 미국의 주요 방안을 통째로 소련에 넘겨 준 거물 간첩. 주중대사가 “루즈벨트는 히스의 꼭두각시였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의 재판 뒤 애치슨은 “나는 히스를 배반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리처드 닉슨 등 공화당 의원들은 분노했다. 애치슨과 히스는 하버드 법대 동문. 좌파 연방대법관 펠릭스 프랑크퍼터의 수제자들. 사회주의 ‘뉴딜정책의 보병들’로 불린 동지였다.

제섭과 애치슨 모두 이념이 같지 않다면 히스를 강하게 변호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제섭을 트루먼은 1951년 유엔 미국 대표로 지명했다. 상원은 제섭의 공산주의 활동을 문제 삼아 인준을 거부했다. 트루먼도 제섭이 공산주의자임을 모를 리 없었을 터. 그러나 상원을 피해 임시대표에 임명할 정도로 제섭에 집착했다.

상원의 인준 부결은 제섭이 공산주의자임을 확증한 것이었다.

제섭은 ‘태평양관계연구소(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IPR)’ 의장이었다. 이 단체는 미국의 동아시아·태평양 정책을 연구한다 했으나 공산주의 목적에 따른 정책 수립과 선전, 군사정보 수집의 도구로 간주되었다. 국민당과 장개석 반대 운동을 주도한 반면 중공과 모택동 신화 등의 선전에 앞장섰다. 이 연구소를 통해 제섭은 히스, 하버드 경제학 박사로 재무부에서 암약한 소련 간첩 해리 화이트 등 공산주의자·소련 스파이들과 밀접하게 어울렸다.

유엔 등 국제단체의 공산당 동조자를 조사한 하원 위원회는 “IPR은 단순한 전위조직을 넘어 ‘공산주의자 제국주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공산주의 ‘세포’다. 1945년 IPR 대회에 제섭이 추천한 대표 33명 가운데 10명이 공산당원임을 확인했다. 49년 국무부 정책회의에서 제섭은 ‘중공의 아시아 정복은 아시아 혁명의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결과’라며 중공 승인과 경제원조 등을 주장했다”고 밝혔다. 제섭은 다른 4개 공산주의 전위조직과도 연계했다.

제섭은 ‘친 중공 공산주의자’였다. 이는 한국전쟁과 관련,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IPR 관련 상당수는 공산주의자이며 소련 스파이 또는 협조자였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은 기관지 ‘퍼시픽 어페어즈’의 편집장 오웬 라티모어. 중국 텐진 출생. 연안에서 모택동·주은래와 만나기도 했다. 국제공산당 당원인 IPR 사무총장은 의회에서 그가 소련 스파이임을 증언했다.

라티모어는 49년 7월 미국 신문에서 “이승만 정권의 한국은 실패한 나라다. 생존 가능한 정부가 아니다. 소련의 지원으로 북한이 공격할 경우 방어할 수 없다. 미국의 방위 예산을 한국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장개석을 극도로 나쁘게 평가했듯 이승만도 강력히 비난했다. 이는 미국 공산주의자·소련 간첩들이 모택동에게 중국을 넘기기 위한 정지작업으로 장개석 정부를 부정부패 정권으로 몰아가 미국의 지원을 중단케 한 상황과 같다. 그들은 중국을 소련의 아시아 기지로 만들려 했다.

프레드릭 밴더빌트 필드는 철도·해운으로 미국 최고 부자였던 코넬리우스 밴더빌트의 고손자. ‘미국공산당’ 입당 등으로 밴더빌트 가문으로부터 한 푼의 유산도 받지 못하고 절연 당했다. 1930년대부터 공산주의 단체에 기부하고 IPR에 글을 썼다. 반국가 단체로 지정된 공산주의 조직 사무총장으로 ‘평화운동,’ 미국의 국민당 정부 지원을 막는 활동을 했다. 소련 스파이로 확인되자 멕시코로 도망갔다. 제섭과 밀접한 관계였다.

연구원 지차오딩(冀朝鼎)은 컬럼비아대 경제학 박사. 미국공산당 당원, 중국공산당 비밀당원. 장개석의 국민당 재정고문으로 암약했다. 그가 “제안한 ‘중국 금 위안’ 발행은 경제 붕괴를 가져 와 국민당 정부가 망하도록 했다.”

제섭은 한국에서 이승만 대통령 등과 무슨 얘기를 했는가? 한국전쟁 중 어떤 역할을 했는가? 트루먼은 어떤 인물이기에 제섭을 중용했는가?

[손태규 한국외국어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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