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업계를 홍대 바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곳에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리우던 홍대의 옛 정취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홍대에서 활동 중인 네 명의 출판인이 돌아가며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
![]() |
사실 어느 경우에도 성공과 실패 확률은 50:50이다. 하지만 어디 세상 이치가 그런가. 우리 눈과 마음은 이런 확률 법칙 따윈 가볍게 무시하고,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인지 편향의 함정에 자주 빠진다.
그래도 자제력이 있는 사람, 시쳇말로 멘탈이 강한 사람은 그릇된 판단에 제동을 걸고 오류와 편향을 피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아르투어 슈니츨러 소설 〈한밤의 도박〉은 이런 기대를 처참히 무너뜨리고, 저 두 심리 법칙이 인간 운명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뒤바꿔놓는지 잘 보여준다.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빈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소설가다. 원래 가업을 이어받은 의사였으나, 의사보다는 작가로서 삶에 더 열정적이었다. 동시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그를 자신의 ‘정신적 도플갱어’라 칭할 정도로 프로이트 이론을 희곡과 소설로 탁월하게 구현해냈다는 평을 받는다.
그런 슈니츨러의 소설 〈한밤의 도박〉은 어느 일요일, 빌헬름 카스다 소위의 숙소로 옛 동료 보그너 중위가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보그너는 도박에 빠져 빚을 지고 불명예 전역한 뒤 다른 일자리를 구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금에 손을 댔다며 빌헬름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빌헬름 역시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데 급기야 수중에 있는 푼돈을 밑천 삼아 도박판에서 돈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부탁을 가장한 보그너의 뻔뻔한 요구에 도박이라는 악수를 두다니, 빌헬름은 오만하게도 자제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걸까. 그는 “군 장교라면 노름질을 하더라도 정도껏 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며 자신은 보그너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는 절제할 줄도, 유혹을 이겨낼 줄도 안다고 믿는다.
그러나 돈을 잃고 따기를 반복하다 기대 이상의 돈이 눈앞에 보이자, 빌헬름은 “제어하기 어려운, 정말로 무서운 욕구가 치밀어 오르며” 자제력을 완전히 상실한다. 결국 그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큰 빚을 지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목숨과 맞바꿀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된다.
〈한밤의 도박〉은 유독 제한된 시간 설정으로 긴장감과 압박감을 높인다. 일요일 아침 빌헬름을 찾아온 보그너는 월요일 아침까지 횡령한 돈을 되돌려놔야 한다고 말한다. 빌헬름과 마지막까지 대결을 벌인 슈나벨 영사는 정확히 새벽 2시 30분에 판을 끝내자고 (2시 5분에) 제안한다. 빌헬름은 어마어마한 도박 빚을 단 24시간 내에 갚지 않으면 군복을 벗을 위기에 놓인다.
이처럼 촉박한 시간은 빌헬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충동을 부채질한다. 슈니츨러는 내적 독백이라는 파격적 서사 기법으로 내면 충동과 의식 흐름을 묘사했는데, 이 작품에서도 서술과 대화와 독백이 어지러이 뒤섞이며 빌헬름의 불안한 심리와 탐욕이 사실적으로 드러난다.
그의 작품은 보수적 관념이 지배하는 빈 사회 무의식적 욕망과 위선을 폭로해 당대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퇴폐적이고 노골적인 묘사에 치중하며 사회 변혁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통속문학 작가로 평가절하 되기도 했다. 그러다 20세기 중반 연극 연출가인 아들 하인리히 슈니츨러가 아버지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재해석하면서 비로소 새롭게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 작품은 1926~1927년 한 신문에 연재되며 세상에 나왔다. 연재소설 특성상 마치 요즘 드라마처럼 다음 회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증을 자아내도록 각 장을 마무리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원제 ‘Morgengrauen’은 원래 독일어로 ‘새벽녘, 여명’이라는 뜻이 있는데, 국내에는 〈마지막 도박〉이라는 제목으로 1999년 처음 출간되었고 올해 〈한밤의 도박〉으로 개정판이 나왔다.
![]() |
|번역가 조민영. 세 아이가 잠든 밤 홀로 고요히 일하는 시간을 즐긴다.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번역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저작권자ⓒ 뉴스밸런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